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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판 어벤져스, 차별에 굴하지 않고 책 속 세상을 넘어 현실에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다서평 2019. 7. 14. 04:49
언젠가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능력에 관한 인상깊은 문구를 본 적이 있다. 그 문구는 다음과 같다.
능력과 성격의 다양성은 보통 상상의 질서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재능에는 육성과 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재능을 타고났더라도 그것을 키우고 갈고 닦고 훈련할 환경이 되지 않으면 재능은 잠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모든 사람이 능력을 배양하고 가다듬을 기회를 동등하게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런 기회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는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상상의 위계질서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달려있다.
해리 포터가 좋은 예다. 특출한 마법사 가문에서 벗어나 무지한 머글 집안에서 양육된 해리 포터는 마법 경험이 전무한 상태로 호그와트에 도착한다. 그가 자기 능력에 대한 확고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타고난 능력을 알게 되기까지는 일곱 권의 책이 필요했다.
둘째, 다른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정확히 같은 능력을 개발했더라도 이들이 똑같이 성공할 가능성은 적다. 게임에 적용되는 규칙이 각기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지배하의 인도에서 불가촉천민과 브라만이, 혹은 아일랜드 태생의 가톨릭 신자와 영국 신교도가 어떻게 해서든 똑같은 상업적 통찰력을 개발했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들이 부자가 될 확률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경제라는 게임은 법적인 제약과 비공식적인 유리천장으로 조작되게 마련이다.사피엔스, 201~202p
그러니까 결국 어떤 사람이 온전히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데에는, 재능하나만가지고 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우선 첫번째, 재능을 육성시킬 수 있는 책과 같은 보조 도구 존재 유무, 스승의 존재 및 주변에 교류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들 존재 유무, 온전히 재능 육성과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는 기나긴 시간과 조력의 뒷받침, 여기에 두번째로 그(녀)가 속한 당시 사회 위계질서에서 어느 위치에 자리하느냐 등의 상당히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조건들은 과거로 가면 갈수록 진입장벽이 높다. 불과 100여년 전만해도, 집안이나 신분, 인종, 성별, 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인지, 아닌지가 교육과 출세에 영향을 매우 미쳤으니 말이다. 현대에 누구에게나 교육의 기회가 활짝 열려있고,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어느정도의 출세는 보장할 수 있는 것과는 달리 그 범위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시골에 내려가 서당선생을 하든지, 방랑하든지 하며 본인의 생을 서글픔 속에서 이어가야만 했었다.
그리고 여기, 작중에 소개되는 인물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등도 바로 위에 언급한 첫번째 조건은 충족하지만, 두번째 조건(계층)이 충족되지 않아 능력을 펼치지 못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그저 이들의 신분이 정실부인에게서 난 자식이 아닌 서자 출신이라는 이유하나만으로 분명히 능력도 출중하고, 또 나라를 잘 일으켜보려는 포부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이 막혀버린다. 벼슬길이 막히니 가난해지고 이러다 굶어죽겠다싶어 상인과 같은 일을 해보려고도 해도, 그래도 반은 양반이라고 상인의 직업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벼슬길에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상인의 일을 해보지도 못하는 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슬픈 비극의 주인공들은 때로는 자신의 아픔을 같은 처지에 놓여있는 사람들과 위로하며, 때로는 같이모여 본인이 읽은 책, 세상에 대해 논하면서 본인의 서글픈 처지를 달랜다. 이들의 슬픔과 아픔은 어느덧 백성들의 가난과 생활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승화되고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못하지만 이들은 꾸준히 본인의 실력을 갈고 닦는다.
이윽고, 연마된 돌은 언제까지나 땅에 버려져있지 않는다는 어느 한 격언처럼, 영조시대가 가고 정조시대가 도래하면서 이들의 미래에 밝은 한줄기 빛이 비춰진다.
새로 부임한 왕은 선입견에 입각하지 않고 처지나 조건보다도 그 사람이 지닌 능력과 인성을 먼저 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의 뜻에 따라 이덕무를 필두로 그의 벗들도 조정에 차례차례 불려가면서 정조와 함께 더 나은 미래를 그린다.
인상깊었던 부분은..
이 서술의 진행자인 이덕무가 차례차례 본인의 벗들을 소개하는 쳅터였는데, 이 시대의 배경이 유교사회라 나이에 무척 민감할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귐에 있어 나이의 많고 적음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책에 자주 벗으로 등장하는 유득공만해도 이덕무보다 일곱살 아래, 박제가는 아홉살 아래, 그의 처남인 백동수는 두살아래, 심지어 막판에 사귄 벗인 이서구는 13살 아래이다. 특히 이덕무와 이서구와의 관계를 보면서, 어떻게 이 시대에 신분과 집안의 차별과 편견은 심하면서 나이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나싶었고, 또 이황과 이이의 관계도 떠올랐다. 이 둘의 관계도 나이차는 잊고 편지로 불꽃 튀기듯이 논쟁을 벌였다지.. 그런 거 보면 오히려 옛사람들이 나이에 대한 편견이 없었던 듯 싶다.
또다른 부분은 연암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기와조각과 똥거름에 주목했던 부분이다. 본인은 양반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이론에 치우치지 않고, 선입견에 갇혀있지 않고, 남들이 보는 하찮은 것을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 적용시켜볼 수 있을까 여러 고민을 한 흔적들이 놀라웠다. 다른 여타 양반들처럼 '에헴!'하고 백성들의 생활에는 신경끄고 본인 편하게 살 수도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자신을 넘어 타인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의 존재는 희귀하기에 더욱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물론 다른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 북학의를 저술한 박제가, 무예도보통지를 제작한 백동수도 대단하고 말이다. 한편으론 편견없이 그들의 능력을 알아본 정조대왕도 인상깊었다. 그의 알아봄이 없었다면, 그들의 재능은 그냥 산야에 파묻혔을 텐데 말이다. 이런 혁신적인 인재등용은 앞서 세종대왕에 견줄만하지 않을까.
아무래도 정조대왕과 백탑파들(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백동수, 이서구 등)은 환상의 파트너였던 것 같다.
자, 그러면 현대에 살고 있는 나도, 그들의 사상을 본받아 지금 현실에 적용시킬 부분을 강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한번 이들의 삶에서 본받아 배워야 할 점들을 찾아 간단히 다음과 같이 추려보았다.
1. 사람을 볼 때, 처지나 조건보다도 언제나 그 사람이 지닌 능력과 인성을 먼저 보자.
2. 벗이 될 수 있는 대상과 범위는 정해져 있지 않다. 옛날과 지금의 시차를 넘어서 때로는 양반과 서자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의 차이를 넘어서, 나이가 많고 적음의 차이를 넘어서 벗이 될 수 있다. 심지어 그 벗은 책이 될 수도 있다.
3. "문과 무는 수레의 두 바퀴처럼,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던 정조처럼, 문무를 겸비하자
4. 기와조각과 똥거름을 귀하게 봤던 연암선생처럼 선입견에 갇혀있지 말고, 하찮게 보던 것도 다시 보고,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시켜 볼 수 있을지 머리를 요리조리 굴리자.
5. 재능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있는 건 중요하다. 나도 백락 1이 되자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라.” 라는 공자의 말처럼 내가 누군가를 알아봐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자. 그리고 누가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갈고 닦는 걸 게을리하지 말자.
이덕무가 살던 조선시대는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왕이 알아주질 못하면 꽝이었지만, 지금과 같은 신분제가 철폐되고, 교육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평등한 시대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과거역사를 통틀어서 지금 시대처럼 기회가 많이 열려있는 시대는 드물다. 이런 시대는 누구나 백락(알아봐주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또 능력을 알아봐줄 사람을 만날 확률도 더더욱 많다. 그러니 갈고 닦자, 백락도 되자.
6. 이론에 치우쳐 또는 과거의 영광에 빠져 시대의 변화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자.
그 당시 대부분의 양반들은 시대가 변했음을 인지하지 못했고 그래서 새로 들어선 강대국이었던 청나라를 마냥 오랑캐라고 무시를 했으며 이런 태도는 후세에도 계속 이어져 나라의 운명이 외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후의 역사는? 한 많은 역사가 되었다...
7. 항상 열린 태도를 유지하자
이 책의 줄거리는 이덕무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데, 그 후의 뒷이야기를 보니 운명이란 참으로 가혹하다. 정조가 마흔아홉이란 한창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어린 순조 임금을 대신해 세도정치가 득세하게 되어 규장각은 축소되고, 장용영도 해체되고, 박제가는 시대에 휘말려 유배생활까지 한다. 정조와 백탑파들이 만들었던 공든 탑들이 와르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 시대를 겪으며 이덕무의 벗들은 정조가 있던 시절이 얼마나 잠깐 꾸는 꿈과 같이 느껴졌을까 싶어 허망한 그들의 기분이 절로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간신히 불었던 개혁의 바람이 꺼져버림으로써 조선의 역사는 더 발전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역사에 '만약'이란 건 없는 걸 알지만, 만약 정조대왕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개혁은 더 활발히 이루어졌을 것이고, 인재들은 신분고하 상관없이 고루고루 뽑혔을 것이며, 실학자들의 행보는 더 박차를 가했을 텐데 말이다.
그치만 연암 박지원,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이서구 등 이들 실학자들의 노력이 마냥 헛되진 않았는지, 이들의 사상은 후에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갑신정변을 일으키는 김옥균과 홍영식, 박영효까지 그 명맥이 이어진다. 이들은 스승 박규수(박지원의 손자)와 함께 연암집을 읽으며 새로운 문명에 대해 토론했다고 한다. 그리고 현대의 우리에게 이런 책으로 내려오고 있고 말이다. 실사구시(사실에 토대를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 정신을 잊지 말자.
-끝
- 伯樂 (백락) : 중국(中國) 전국시대(戰國時代) 사람으로 말 감정가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이 유명하다.
"世有伯樂然後 有千里馬〔세유백락연후 유천리마〕: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어야 천리마(千里馬)도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재능(才能)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진가(眞價)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재능은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그대로 썩어버린다. (천리마-재능-는 항상 있지만, 백락-알아보는 사람-은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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